YOUNGJOO JEON

Statement




셋을 말하는 동시에 하나를 말하기

김진주
위아래가 뒤집힌 그림 두 개가 보인다. 하나는 넓게 칠한 광활한 하늘과 차곡히 채운 황토빛 흙더미가 그려진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촘촘히 채운 거대한 너울과 큼직하게 칠한 회색빛 아스팔트가 있는 그림이다. 두 그림은 왜 뒤집혀 있을까? 무엇을 뒤집으려 한 걸까? 풍경의 요소인가, 물감의 색인가, 대상의 표현인가, 기법의 차이인가. 실은 뒤집은 것이 아닐지도. 무언가를 동시에 ‘뒤집어쓴’ 것인지도 모른다.
전영주는 평면이 평면인 상태와 평범한 장면이 평범한 상태를 의심한다. 네모반듯한 판 하나를 상상해보자. 종이는 당연하고, 평평하기 위해 만들어진 나무판 또는 플라스틱판, 스테인리스판 등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판’은 결코 완벽하게 평평하지 않다. 또 하나, 이번에는 평범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해수욕장에서 크레인이 흙을 옮기는 장면, 방파제 위로 파도가 넘실대는 장면, 내가 탄 오리배 창문 너머로 다른 오리배가 보이는 장면.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 장면들은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낯선 순간으로 여겨질 수 있다.
평평한 판이 평평하지 않다는 의심, 평범한 장면이 평범하지 않다는 의심은 전영주의 시선을 관통해 세상 밖으로 뻗어간다. 점차 그 의심들은 본래의 상태에 대한 불신이 되고 불평이 되어 평평함과 평범함의 껍질을 벗어나 두꺼움과 의뭉스러움의 영역으로 퍼진다. 그가 말하는 입체적인 것, 조각적인 것, 물성이 있는 것, 그리고 움직이는 것으로 말이다. 불신과 불평이 된 의심을 ‘뒤집어쓴’ 채.

회화: 내 눈에 걸린 것―풍경을 의심하기
개념적으로 잘게 쪼개진 오늘날의 회화는 순수한 표현의 상태만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 할수록 눈에 남은 잔상, 머리로 이해한 기억, 마음 한켠의 추억이라는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 이때 회화가 회화로 남도록 돕는 것은 회화를 의심하는 일이다. 잔상과 기억, 추억에 담긴 피상적이고 주관적인 감정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회화라는 광의적 개념을 의심하는 화가의 태도를 들이미는 것이다.  
전영주는 성수기 관광객이 해수욕장을 가득 메우는 곳에 살았다. 이 말은 전영주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보편적 잔상 또는 기억,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누구나 성수기에 해수욕장을 가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관광객이 없는 비수기의 해수욕장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한정적이다. 우연히 그곳에 방문한 누군가, 그리고 그곳에 사는 주민들. 그들이 지켜보는 동시에 해수욕장은 다시금 해수욕장이 되기 위해 모래사장을 정비한다. 성수기와 비수기가 엮이는 시간 동안 사람이 바뀌고 모습이 변하는 그곳을 놓침 없이 바라봐온 그에게 이런 광경은 ‘거짓’에 가깝다.
창문을 그린 그림은 어떤가? 전영주는 검은색 창틀을 그리며 ‘여우 창문 너머로 풍경을 보면 귀신이 보인다.’라는 미신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여우 창문은 모종의 프레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프레임 너머에 풍경이 있고 또 풍경 너머에 귀신이 있다는 말로 풀어진다. 실제로 그가 풍경을 본 적은 있지만 귀신을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귀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의심, 어쩌면 풍경 속에 내가 본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그림의 시작에 놓이는 것이다. 그렇게 그가 본 장면들 속에서 거짓된 부분이 반복적으로 발견되고, 그것은 계속해서 그의 눈에 ‘걸린다.’

입체: 불신, 복제된 것―회화를 의심하기
자신의 눈에 걸린 모습을 확인한 전영주는 이를 회화로 옮긴다. 이때 그 모습들은 캔버스라는 판 위에 그려지는데, 캔버스는 본질적으로 평평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의 의심이 배가된다. 아무리 부드러운 붓을 쓰고 묽은 물감을 쓸지라도 그는 캔버스와 붓, 물감이 지닌 거친 표면과 물성을 피할 수 없다. 그 자각이 확신으로 인식되는 순간부터 전영주의 그림은 평평하기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난다. 다시 말해 그의 그림은 스스로의 존재 이유로 거슬러 올라가 어떤 장면이 그려지더라도 의심만을 받고 마는, 필연적 운명으로 다시금 존재하기를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히 따져보면 그가 캔버스 위에 그린 그림은 그림이라 부르기 어렵다. 그림이라기보다는 스스로 평평하지 않음을 내세우는 상태, 달리 말해 입체적임을 뽐내는 상태에 가깝다. 종종 캔버스 위를 시원하게 지나가는 커다란 브러시 스트로크가 눈에 띈다. 물처럼 묽은 이 스트로크는 종이 위에 칠해졌다면 종이 안으로 흡수되어 얇은 형체를 지닐 것이다. 하지만 울퉁불퉁한 요철을 가진 캔버스 위에서 그것은 어딘가로 흡수되지도, 그 물감을 내려다 준 붓의 모양을 없애지도 못한 채 두텁게 얹어지고 만다. 작은 터치, 다채로운 색깔, 수많은 기법을 써봐야, 당연하게도 이들이 지닌 물리적 특성은 그대로 유지되고 말 것이 명백하다. 여기서 전영주는 다시 한번 의심을 불러낸다. 앞서 전영주의 그림은 그림이라 부르기 어렵다고 말했는데, 다시 시작된 의심은 조금 더 동적인 과정을 발현시킨다. 그는 물성이 도드라질 수밖에 없는 그림들을 보며 이를 이용해 입체물 하나를 만들고자 마음먹는다. 그림을 그린 캔버스 전면에 실리콘을 부어 틀을 만들고, 그 속에 레진을 붓는다. 레진이 건조되면 주형과 주물을 분리한 뒤 레진만 남기고 캔버스는 버린다. 결과적으로 레진의 표면에는 캔버스의 표면이 떠지게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레진이 캔버스 표면을 ‘복제’한다는 사실과 캔버스가 레진을 위한 ‘과정’으로만 남는다는 점이다.
레진은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과 달리 색이나 레이어를 반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림을 그릴 때 그림 그린 이가 색을 선택하고 레이어를 나눈 시간을 가져가지 못한다. 결국 남는 것은 완성된 그림 위에서 떼어낼 수 있는 하나의 결과물로 통합된 울퉁불퉁한 표면일 뿐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온갖 수사적 양태가 붙는 모사하기나 따라하기가 아니라, 일종의 껍질만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건조하기 짝이 없는 ‘복제하기’에 가깝다. 이제 평면은 자신이 존재하기를 다시 시작했던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입체물을 위한 과정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즉, 그림은 입체물을 위해 그것이 지닌 표면을 내놓음으로써 자신의 소명을 다한다. 풍경 이야기와 회화 이야기를 떼어내고 전영주의 의식 속을 들여다본다. 그가 처음 지녔던 의심이라는 자각은 의심에 의심을 더한 불신에 가까워졌는지도.

연극: 아마도, 불평스러운 것―더 잘 의심하기
불신이 된 의심은 불신으로 남기를 멈추지 않고 불평으로까지 뻗어간다. 이번 전시에서 전영주는 스스로 연극적 조각이라 부르는 신작 ‘슈링클스’와 ‘근본 조각’을 선보인다. 이는 전시 제목인 ‘노멀 매핑’의 하위 개념으로, 그가 회화에서 의심에 의심을 더했던 자각을 세분화해 또 다른 의심을 시도하는 일이다. 이번에는 레진으로 만든 입체물이 그의 의심 대상이 된다. 입체는 정말로 두꺼운 것일까? 입체는 정말로 평면의 것을 ‘복제’했는가? 이런 질문은 끝내 회화와 입체의 경계, 그 둘에 존재하는 평행선으로서의 관계, 하나로 점찍힐 수 없이 돌고 도는 임계를 확인시킨다.
바이스 또는 다보를 다리 삼아 얹어진 레진은 그림자 연극에서 사용되는 핀 조명 아래에 선다. 캄캄한 주변, 자신만을 비추는 조명 밑에서 레진은 불빛이 자신의 몸을 관통하기를 내버려 둔다. 심지어 자신의 몸 뒤로 조도에 따라 명암의 정도가 달라지는 그림자가 생기도록 내버려 둔다. 그렇게 입체가 된 회화는 공간 속에 놓이고, 일종의 연기자가 된 입체는 깊이(depth)를 만들어 낸다. 여기서 깊이란 레진과 벽 혹은 바닥 사이에 생긴 공간, 실연자(레진), 그의 부산물(그림자), 명암의 변화(조도)를 통해 움직임(play)의 가능성을 상상케 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즉, 평평함과 평범함에 대한 그의 의심은 연극이 실연되리라는 기대를 만드는 행위를 통해 움직임에 관한 사유로까지 확장해간 것이다.
회화가 입체가 되고 입체가 연극이 된 상황을 제외하고 가장 처음과 마지막 고리만을 떠올려 보자. (고정된) 풍경은 (고정되지 않은) 풍경이 되었다. 되돌리고 되돌려 처음으로 돌아가고 다시 끝으로 돌아오는, 마치 어설픈 수미상관처럼 느껴지는 이 상황은 그의 작업 전반에 녹아든 사유를 설명한다. 이제 전영주의 의심은 불신에서 나아가 불평으로까지 번진 건 아닐까? 스멀스멀 계속해서 입에 머금게 되는 그런 불평스러움 말이다. 결국 연극은 의심의 고리를 강화시킬 뿐.

 ‘노멀 매핑’이라는 3D 프로그램 용어를 가져오는 일은 무언가가 ‘씌워지는’ 상상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씌워짐에 대한 상상은 상상하는 이의 머릿속에 표면에 대한 사유가 있음을 의미한다. 평범한 장면이 평범하지 않음을, 캔버스가 평평하지 않음을, 입체가 두껍기만 하지 않음을. 그는 표면이라는 쟁점 아래 그것의 스펙트럼을 파헤치기를 반복한다. 표면에 대한 감각이 하나의 특정한 매체에만 속하는 것이라 여기기를 거부한다. 평면에서 시작했지만 입체로, 연극으로 나아가는 그의 표면 탐구 여정. 평평함과 평범함으로부터 시작된 의심의 고리들. 의심과 불신, 불평으로 뻗어가는 사유들. 이것들이 계속해서 중첩되는 바로 그 지점들. 전영주는 셋을 말하는 동시에 하나를 말한다.



YOUNGJOO JEON 전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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